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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이민 일기장

미국 코로나 이후의 나의 삶 My quarantine life after covid-19

by my immigration diaries 2020. 8.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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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로라도 덴버에서 발견한 조지 플로이드 추모 전단

Disclaimer;
제 블로그의 글들은 저의 개인적인 경험담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정확한 정보를 원하시는 분은 블로그 글 보다는 공식 홈페이지를 참고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올 해도 벌써 8월이 거의 끝나간다. 코로나 사태 이후 천천히만 흘러간다 생각했던 나의 삶도 꾸역꾸역 어떻게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올 해 상반기 나의 삶이 어땠는지 뒤돌아보고자 새 글을 열었다.

 

2020년이 되었을 때 나랑 남편은 새해가 온 것에 많은 감흥이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억지로 나라도 밝은 척 신나는 척 했었고 남편은 기념 촬영때도 데면데면 했으니까. 그 이유는 간단했다. 왜냐하면 미국의 겨울 방학은 그리 길지 않고, 남편은 학기가 시작되는 것을 우려해 짧은 방학을 즐길 여유도 없었다.

 

그렇게 1월이 오고 우리는 학교로 돌아갔다. 1, 2월을 기억해보면 그 당시 막 중국에서 엄청난 바이러스가 퍼졌고, 한국이 초기대응을 잘 못해서 많은 감염자들이 났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이고 빠른 대처를 했던 걸 뉴스로 본 기억이 난다. 그 때까지 솔직히 미국에서 그 바이러스에 대해서는 강건너 불구경인 느낌이었고, 오히려 나는 한국에 있는 사람들이 어서 낫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당시에 일본 친구를 만나 이야기 한 적이 있었는데, 일본도 상황이 다르지 않아 가족들이 걱정된다고 했던 기억이 난다. 그 외에는 우리는 자연스럽게 어디 음식점이 좋은지, 요즘 뭐 하고 놀면 재밌는지 따위의 일상적인 이야기들로 시간을 채웠다.

 

당시 미국에서도 코스트쪽 주에서 소수의 확진자들이 나왔다는 뉴스를 보았고, 우리 주에 있는 전국에서 손에 꼽히는 명문 병원+의대 에서는 그 확진자들 중 일부를 케어하기 위해 직접 그들을 네브래스카로 데리고 와서 치료와 격리를 한다고 하는 뉴스를 보았다. 나는 당시에 한국 소식을 많이 접했기 때문에 그 소수라도 우리 주로 데리고 오는 것에 대해서 불안한 감정이 있었다. 그러나 그 뉴스의 미국 사람들의 댓글에서는 그 사실에 대해 너무나도 자랑스럽게 이야기 하는 것을 보고 이 사람들은 긍정적이고 희망이 있는 사람들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이 때 나는 다른 친구와도 이야기 나눌 기회가 있었다. 그로부터 지금 내가 사는 지역에서 중국인들이 조직적으로 마스크를 사재기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그 이유가 궁금했는데, 우리 지역에 사는 중국인들은 마스크를 구입한 후 중국에 있는 자신들의 가족에게 보내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그 당시 마스크는 중국 안으로 들여올 수 없는 품목에 속해있어서 반송되거나 파기된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 사람들은 애국심을 보여주기 위해서 마스크를 조국으로 보내고 있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래서 친구는 이미 그들이 움직이는 소식을 듣자마자 자신도 손소독제랑 마스크를 구입해 뒀다고 이야기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마음이 조급해진 나는 몇 군데의 슈퍼와 약국을 돌아다녔는데, 마스크는 하나도 구할 수 없었고, 손 소독제도 품절이었다. 내가 그나마 구할 수 있었던 것은 일회용 장갑 뿐이었다.

 

그렇게 2월 중순 나는 겨울학기를 마치고 다시 2주 간의 짧은 방학을 마치고 3월에 다시 봄학기 개강을 하면서 학교로 돌아갔다. 이 시기가 우리 주에서 코로나 바이러스가 처음으로 확산이 된 때로 기억한다. 나는 서둘러 아마존과 월마트 앱에서 덴탈 마스크를 구입했다. 나는 아마존 프라임을 쓰는데도 불구하고 이미 많은 마스크가 동나있는 상태였고, 배송 또한 최소 한달이 걸린다고 했다. 결국 몇 주 후 월마트에서 산 마스크는 도착했고, 아마존에서 산 마스크는 한달 뒤 판매자측에서 취소 하여 환불을 받았다. 손소독제도 동네에서는 동이 났기 때문에 온라인에서 여러 번 구매를 시도했고, 거의 다 품절이었는데 겨우 딱 한군데에서만 구입을 할 수 있었다.

 

3월 첫 주 수업에 갔다. 나는 세 과목을 수강 신청 했기 때문에 그 주에 총 3번의 수업에 참석했다. 학교의 분위기는 굉장히 어수선했다. 왜냐하면 당시 바이러스가 막 퍼지고 있는 상황이어서 모두들 굉장히 불안해 했고, 학교도 주의 행정 명령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기 때문에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학교가 온라인 수업으로 전환될 수 있는 것을 교육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에는 사람들의 인식 자체가 이 바이러스에 대해서 그다지 깊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나는 그래도 한국에서의 소식을 계속 듣고있던 사람이니까 굉장히 여러가지로 두려움이 있었다. 그러나 내가 들었던 수업 중 한 교수님은 자기 딸이 의료계에 종사하는데 이건 독감이랑 비슷하니까 걱정 하지 말라고 했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사람은 어차피 한 번은 죽는데 신의 뜻에 맡긴다는 말도 했다. 그러니 난리 칠 필요도 없고 온라인 수업을 하는 것도 좀 이해가 안간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했다. 솔직히 그 말을 듣고 나는 너무 어이가 없고 화가 났는데, 선생님이기도 하고 영어가 딸려서 그냥 듣고 있었다. 

 

그렇게 첫 수업들을 끝마치고 학교는 개강 첫 주 금요일을 기점으로 모든 수업을 온라인 수업으로 변경했다. 나는 그 당시에 litigation 수업도 신청했었는데, 현장강의를 들어도 특히나 어려운 수업이었다. 교수님도 굉장히 나이 많으신 퇴직한 판사 출신 교수님이었고, 원하는 수업 방식도 열정적인 debating 을 원하셨다. 그런데 둘째 주 부터 zoom으로 그렇게 운영하시려고 하니 학생들도 그렇고 교수님도 엄청 우왕좌왕 하셨다. 특히나 그 수업의 마지막 과제는 학생들을 두 팀으로 나누어서 어떤 가제의 사건을 변호해야 했는데, 그걸 zoom으로 한다고 하셨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수업을 마친 뒤 조용히 다른 수업으로 변경을 했다. 도저히 내가 따라갈 수 없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봄 학기는 집에서 열심히 온라인 수업을 따라가고, 최대한 바깥 외출을 자제 했으며, 강아지를 입양하면서 빠르게 지나갔다. 나는 그리고 학교를 등록한지 1년만에 여름 학기에 휴학을 했다.

 

5월이 되고 남편과 나는 방학을 시작하면서 조금 여유롭게 지냈다. 그 동안 둘 다 학교 생활을 하느라 지쳐있기도 했기 때문에 방학을 하고 며칠은 늘어져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냈다. 남편은 원래 본성이 집순이이기도 하고, 나도 그 당시 모든 레스토랑이나 가게들이 닫았기 때문에 어딜 나간다는 생각을 못하고 지냈다. 가끔 슈퍼에 장을 보러 가면 사람들은 반절 정도 마스크를 착용했고, 반절정도는 착용하지 않았다. 한국에 있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마스크 중에서도 비말 통과가 안되는 쫀쫀한 것만 쓰던데 여기 사람들은 그냥 손수건같은걸로 가리기도 하고 천을 잘라서 쓰기도 하고 제각각이었다. 나도 그때 월마트 온라인에서 겨우 구한 덴탈 마스크로 연명하며 지냈다.

 

방학이 어느정도 지나고 엄마가 우리가 걱정된다며 차곡차곡 모아오신 마스크 몇 장을 보내주셨다. 마침 덴탈마스크도 떨어져가는 상황이어서 너무나도 감사했다. 지금도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그 당시에는 직계 가족에게만 마스크를 보낼 수 있고, 수량도 제한적이었기 때문에 굉장히 귀했다.

 

5월 말부터 조지 플로이드의 죽음을 추모하는 BLM 시위가 있었다. 미네소타에서 시작되었지만, 우리 주에서도 곳곳에서 시위가 열렸다. 주요 도로들에 큰 인파가 몰렸고, 시위대와 경찰이 대치되는 상황이 있었다. 내 주변에서도 시위에 참가한 사람들이 있었다. 미국에서는 한국과는 다르게 경찰이 최루탄을 쓸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작년에 친구랑 가서 춤을 배우던 클럽이 있었는데, 거기 주인이 시위대 중 한 흑인을 쏴서 죽였다. 그 일로 우리 동네에서는 추모 시위가 열리기도 했다. 유색인종 중 한 사람으로서 나는 밖에 나가는 것이 두렵고 무섭기도 했다.

 

6월이 되어서도 상황은 별반 나아지지 않았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집에서 지내는 것이 꽤나 힘들지 않았고, 가끔 공원에 가거나 하는 시간도 보냈다. 당시에 친구가 잠깐 지인의 강아지를 맡아주기로 해서 우리 강아지랑 같이 dog parks도 가고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 때도 가보면 공원에 절반 정도는 마스크를 꼈고, 절반 정도는 안낀 사람들도 있었다. 야외에서도 6 ft 이내로 가지 않으려고 멀찌감치 떨어져서 걷고 멀리서 사람이 오면 돌아가는 식으로 했다. 많은 사람들이 걷고 있지는 않기에 사람을 만날 경우가 드물기도 했다.

 

7월이 되자 슬슬 집에서만 있는게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슈퍼만 잠시 나갔다 오는 생활도 힘들었다. 친구들과도 만나지 않았기 때문에 연락도 점점 뜸해지고 이 때 부터 정신도 힘들어졌다. 그래서 흘러가는 방학이 아쉬워서 남편과 untact 여행을 계획했다. 네브라스카에서 콜로라도를 지나 유타를 돌아보고 오는 일정이었다. 사실 여행을 가야겠다 생각한 건 작년부터였다. 원래 여름방학에 친정 가족이 방문해서 시간을 보내기로 했었다. 하지만 코로나 때문에 그런 모든 것들이 제한이 되었고, 이미 작년에 시가 가족이 방문해서 국립공원 방문카드가 있었던 우리는 유효기간이 끝나기 전에 그것도 이용할 겸 국립공원 여행을 계획했다.

 

원래같았으면 미국의 유명한 국립공원 주변의 숙소 등은 몇 달 전부터 예약을 해 두었어야 하지만, 이번 같은 경우에는 달랐다. 국립공원마다 인원제한이 있는 곳도 많았고, 아예 입장이 되지 않는 곳들도 많았다. 그래서 우리는 출발 3일 까지만 미리 숙소를 예약해두고 그 다음부터는 발길 닿는 곳으로 여행을 하기로 하고 출발을 했다. 콜로라도는 저번에도 가보았기 때문에 지난 번에 들르지 않았던 곳들 위주로 구경을 했다. 그리고 바로 유타로 넘어가서 멋진 국립공원들을 둘러보았다. 우리 강아지를 데리고 하는 첫 번째 여행이었기 때문에 그걸로도 의미있는 여행이었다.

 

Untact 여행이었던 만큼 우리는 사람들과 접촉을 최대한 피했다. 사실 미국에서는 모든 것들이 차만 있으면 drive thru로 되었기 때문에 더욱 가능했던 것 같다. 그리고 공원을 산책할 때에는 꼭 마스크를 하고 다녀서 더더욱 사람들과 접촉이 많이 없었다. 그래도 공중 화장실을 이용해야 했기 때문에 그 점은 신경이 많이 쓰이기도 했다.

9박 10일 정도의 여행을 끝내고 돌아와서 자가격리 2주를 했다. 다행히 남편도 나도 강아지도 모두 괜찮았다.

 

7월 후반부터 8월 후반인 지금까지 우리 가족은 힘든 시기를 보내는 중이다. 우리 둘의 잘못은 아닌데, 우리를 한없이 우울하게 만든 사건이 있었다. 특히 나는 7월 후반부터 지금까지 우울증이 온 것 처럼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것 때문에 남편도 너무나도 힘들게 만들고 있다. 그래도 친구들이라도 만나고 할 일도 많고 바깥에 나가서 일상을 보낼 수 있다면 지금 만큼 힘들지는 않았을텐데 하는 생각도 많이 든다. 그래도 가족들이 아프지 않고 정신적인 아픔이 아닌 다른 어려움은 없는 것을 감사하게 여기고 앞으로 이 위기를 잘 극복해 나가고 싶다.

 

9월부터의 포스트 코로나 일상도 나중을 위해서 틈틈히 기록해 나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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